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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규소설번역/이세계 영웅기담(完)

2화 - 내 역할은 어신체?

by PPJelly 2022. 4. 2.

우리가 눈을 뜨자, 연분홍색 꽃으로 물들여진 거리 한편에 옮겨져 있었다.

살리아는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한껏 떠들면서 도장(都長)에게 보고하고 있다.

 

"정말이에요 아버님! 이 어신체가 저희를 구해 줬다고요!!"

"으음…… 단번에 믿기는 어렵겠지만, 더비 울프 떼를 쓰러뜨린 건 사실이군. 큰일을 했구나, 살리아."

 

더비 울프는 이 근방에서는 최강의 몬스터였다고 한다.

북극곰처럼 큰 늑대가 무리지어 행동하는 걸 생각하면 뭐, 타당하겠지.

이거나 저거나 둘이서 목숨을 걸고 유적에서 입수해 온 어신체――즉 나와 마키나 덕분이라고 한다.

 

"전 봤어요! 전설의 어신체에 깃든 정령이 이 구체에서 모습을 바꿔서, 차례차례 적을 쓰러뜨리는 모습은 그야말로 귀신의 소행! 이 어신체를 회장에 전시하면 분명 <아트 나이트>의 거리는 지금보다 번성하겠죠!"

"그렇구나. 예쁜 딸이 진언한다면 어쩔 수 없지. 바로 공개하자."

 

도장인 아버지도 웃으며 승낙하고, 철의 관은 어신체로써 도(都)의 대회장 중심에 모셔지게 되었다.

그런데 어신체… 내가 어신체라니

 

"있잖아, 마키나. 나 같은 백수를 신으로 모셔 봤자 얻는 것도 없을 텐데 어떻게 생각하냐?"

[부정. 유저와 본 기기의 유니크 스킬 <신체>에는 추앙받는 만큼 영혼의 밀도, 즉 레벨이 상승하는 효과가 있습니다. 신앙은 받으면 받을수록 좋겠지요.]

"유니크 스킬?"

 

[다른 종류가 없는 고유 기능의 총칭.]

"그럼 다행이네. 그래서, 지금 내 상태 이야긴데."

 

일련의 경과를 모두 들은 나는 동시에 마키나의 설명까지도 듣기를 끝마쳐 있었다.

팔짱을 끼고 의젓하게 끄덕인 다음 현재의 사태에 결론을 내린다.

 

"즉――나는 다른 세계로 환생했고, 이 세계에서 한창 소생하던 중이었다는 거지?"

[긍정. 나는 세계에 12개밖에 없는 신조(神造) 병기 중 하나인 <데우스 엑스 마키나>. 다른 세계의 혼을 사용해 강인한 전사를 만들어내는 최고위 아티팩트. 그리고 신들에게 창조된 AI…… 이 시대에는 정령이라고도 불리고 있습니다.]

 

마키나가 긍정하자 나는 방심하고 말았다.

이세계 전생 이야기는 나도 읽은 바 있지만, 설마 내가 경험하게 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그리고 단지라고 생각했던 이 구체는 확실히 나의 신체라는 말이다.

 

"난 그 설산에서의 계약으로 여기에 소환된 거냐?"

[부정. 유저는 유저의 세계의 한 신, 얄다바오트에 의해 혼과 육체가 징수된 뒤 우리의 세계 <발 바티르>로 추방당했습니다.]

"추, 추방이라니…… 내가 무슨 신을 화나게 할 만한 짓이라도 했어?"

[부정. 이것은 쌍방 세계의 신들의 계약에 의한 것. 당신은 신이

 

신: 이새끼 필요음서

 

라고 말씀하시어]

"잠깐만, 신이 까불거리는데?! 그리고 은근 너무하지 않아?!"

[그리고 우리의 신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신: 솔까 필요없지만 쓸데는 있겠지

 

라고]

 

"둘 다 분위기가 경박해!! 그리고 내 취급이 참혹해!!"

 

결코 신앙심이 깊은 게 아니다.

결코 신앙심이 깊은 건 아니지만, 이런 애들 장난질같은 흐름으로 세계에서 덩그러니 추방될 줄이야. 신도 부처도 없다는 것은 바로 이런 걸 두고 하는 말이다.

 

[이번 소생으로 인해 유저는 새로운 사명을 하사받게 됩니다. 소생 후에는 신의 사도로서 목적 달성에 매진하게 되실 예정.]

"시, 신의 사도라…… 경찰관이었다가 갑자기 위대한 일을 하게 됐네~."

 

나 같은 게 신의 사도여도 될까 싶었지만, 날 버린 신이 있다면 거두는 신도 있는 법. 거둬 주신 은혜를 갚는 것도 제2의 인생으로써 재밌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 세계의 신은 내가 뭘 하길 원하는데? 무슨 역할이 있겠잖아."

[긍정. 유저에게는 세계에 흩어져 있는 열두 신조 병기――신기를 모으는 역할이 부여되어 있습니다.]

 

신기? 하고 고개를 갸웃한다.

 

[긍정. 본 기기를 포함해 열두 신기를 모두 모으면, 모은 자의 소원을 이루어 주기로 되어 있습니다.]

"헤, 헤에? 무슨 소원이든 들어 주는 거야?"

[긍정. 주신과 정령의 계약에 의해 무슨 소원이든 들어 줍니다.]

 

그거 대단하군. 무심코 감동하고 말았다.

어릴 적 만화에서나 읽던 이야기가 현실이 된 것이다.

 

"그래도 신이 이렇게 날 보냈다는 말은 신에게도 이뤘으면 하는 소원이 있다는 거 아냐?"

[부정. 유저가 모든 신기를 모았을 무렵에는 유저의 소원을 들어 줘도 괜찮다는 것이 신들의 방침입니다.]

 

나는 놀랐다.

환생시켜 줬고, 소원을 이룰 수 있는 레이스에도 출전하게 해 줬고, 그것도 상품은 마음대로 정하라고 했다.

꿍꿍이가 없을 리 없다.

상대가 신이라고 해도 이렇게까지 널널한 조건이 그냥 주어질 수 있을까?

 

[믿느냐 마느냐는 유저의 자유. 그러나 신들은 하루라도 빨리 소생하기를 희망하고 있습니다. 본래대로면 어제 소생이 완료될 예정이었습니다. 하지만 소생용 마력을 전투에 사용하고 말았기 때문에 소생에는 600일의 기간이 소요될 예정.]

 

600일…… 약 2년인가.

2년씩이나 철구 안에 있으려니 마음이 우울해지지만, 그 때 싸운다는 선택을 하지 않았더라면 분명 후회했을 것이다.

그럼 어쩔 수 없지!

앞으로 잘 부탁한다, 마키나!

 

[긍정. 본 기기와 유저는 운명공동체임을 제언. 함께 갑시다, 죠가사키 류마.]

"좋아! 당장은 이 모습으로 활동할 텐데, 뭔가 할만한 일은 없어?"

[긍정. 우선 세계의 통화나 상식에 대한 면학을. 또한 유니크 스킬 <신체>를 강화하기 위해 도시 인간들의 소망을 적절히 이뤄 주는 것을 추천합니다.]

"사람들의 소원을 들어 준다. 내가 할 수 있을까?"

[긍정. 마력을 다소 소모하므로 무리가 없는 범위에서 하길 바랍니다.]

 

오오, 그렇구나.

하지만 유니크 스킬이 어신체라는 것도 이상하다. 나 같은 게 잘 할수 있을지 불안하긴 하지만 뭐든 해 보는 수밖에 없지.

 

"2년 동안의 '어신체' 생활, 어디 한 번 해 볼까!"

 

이렇게 해서 나와 마키나의 생활이 시작되었다.

구체인 우리들은 회장 중심에 놓였고, 이윽고 제단이 세워졌다.

우리를 모시는 이 도시의 이름은 <아트 나이트>.

 

붉은 기와지붕이 늘어선 거리는 어딘가 일본을 연상시키는 호화로운 모습이다.

거리를 장식하는 거대한 신수는 연분홍색 꽃을 피우며 마치 벚꽃과도 같이 계절을 물들여 간다.

시간도 빠르게 흘러가 맨 처음 1년은 눈 깜짝할 사이 지났다.

 

사계를 축복하는 축제 때는 붉은 초롱불이 거리를 화려하게 장식하고, 다양한 악곡과 노래가 울려퍼졌다.

수많은 제물은 어느 것이든 멋진 향기로 제단을 감싸 주었다.

여러 나날을 보내는 동안에 나는 <아트 나이트>라는 도시를 좋아하게 되었다.

 

아이들은 한 해, 또 한 해 성장했고 조금씩 몸집이 커졌다.

어신체로 받들어지고 있는 나는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며 언제나 미소짓고 있다.

부활의 날이 올 때까지. 계속…… 계속.

 

 

 

*  *  *  *  *

 

 

 

――그리고,

5년의 세월이 흘렀다.

 

 

[야.]

"네."

[아, 실례.

경고. 경고. 경고. 그래요 경고입니다. 죠가사키 료마, 오늘은 심각한 소생 지연에 대해 본격적으로 진언하려고 합니다.]

"네."

 

[본 기기의 스케줄로는 600일로 소생이 종료될 터였습니다. 그러나 유저의 요망을 실현하여 마력을 소모하는 사이 어느새 1800일이 경과했습니다. 족히 3배 되는 일수입니다. 해명을 요한다.]

"아, 아니, 그게, '어신체'로서 신앙을 벌라고 말한 건 마키나잖아."

[만사에는 정도라는 게 있잖습니까?! 그렇게 펑펑 축복을 내려 대면 신앙이 모여도 마력이 안 모아집니다! 소생할 생각은 있으신가요?!]

 

이미 둘러대는 것을 그만둔 신적 AI가 쫑알쫑알 잔소리를 퍼붓는다.

그래, 그런 것이다.

 

어신체란 수많은 사람이 기도하러 찾아와 소원을 비는 물건이다.

근본적으로 구체이고 이곳에서 움직이지 못하는 우리들이지만 상대편에서 소원을 입에 담는 순간 그것을 듣게 되는 것이다.

나에게는 소원을 이뤄 주는 힘 같은 게 아직 없지만, 마키나는 다르다.

 

듣자하니 데우스 엑스 마키나는 모든 상황에 알맞는 스킬, 기능, 마법을 습득 가능하게 하는 말의 명칭이라고 한다.

물론 한계는 있는 것 같으나 그에 관한 설명은 소생이 끝난 뒤에 들을 일.

 

그리고 소생용 마력이라는 건 방대한 마력을 대기 중에서 끌어모으는 것이라 스킬과 마법만 갖춰지면 웬만한 일은 해결할 수 있다고 한다.

 

처음은 사소한…… 그래, 사소한 소원부터였다.

고양이의 상처를 낫게 해 주라는 아이의 소원을 들어 주고 싶어서 그 소생용 마력을 쬐끔 빌어 써 버렸다.

그러자 그 소문은 순식간에 도시에 퍼졌고, 영험하고 효험 좋은 어신체로 인지되고 만 것이다.

 

그 이래로는 그야말로 문전성시.

나을 방도가 없는 병이나 부상자를 치료해 달라는 참배객의 소원을 이뤄 주는 것이 일과가 되어 있었다.

삼림의 수호자인 요정족에다, 심지어는 공작가 사람들까지 찾아와 따님의 병을 낫게 해 달라고 애원하기까지 했다.

지금은 나라에서도 유명한 제단의 어신체가 됐다는 것이다.

 

신앙이 대량으로 모인 덕에 능력치는 당초 예상했던 것보다 월등히 높아졌지만, 소생용 마력은 한결같이 쌓이지 않은 채,

 

결과적으로 1800일―― 5년이 경과했다는 말 되겠습니다.

 

[본 기기는 마음 깊이 맹렬한 반성을 바랍니다. 이러한 사태를 발전시킨 것은 모두 유저의 안일한 인식 탓입니다. 지금 페이스로는 마력량은 항상 미량밖에 안 될 것이고, 1500일이라는 방대한 축적 기간이 더 필요할 것으로 예상됩니다! 여기에 대해 해명을 요한다!]

 

"아, 알았어, 미안하다니까! 생각도 안 하고 돕기만 한 내가 나빴어! 그래도 봐봐, 다들 기뻐했잖아? 특히 난산이었던 아기를 구했을 때는 박수갈채가,"

[조산 축복 스킬 같은 걸 앞으로 어디다 쓰려고요?! 스킬 취득에는 한도가 있다고 설명했을 텐데요!]

 

"화, 화내지 마! 아기가 무사히 태어났을 때는 너도 살짝 안심했잖아! 안도의 한숨을 난 놓치지 않고 다 봤다!!"

[겨, 경고 경고! 본 기기는 신적 AI로서 그러한 감정을 보유하지 않았습니다!]

"시꺼! 그런 식으로 튕기는 것도 처음 1년만이었잖아! 5년이나 같이 붙어 있으니까 안 보고 싶어도 본성이 훤히 다 보이지!"

 

으그그, 하고 침묵하는 마키나.

처음에는 무기질적인 AI인 줄 알았던 마키나도 지금은 이렇게 감정을 드러내게 되었다. 첫 이미지만 봐서는 믿기지 않을 변화다.

노발대발 호통을 쳐대던 마키나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늘어져 있다.

나도 왠지 미안해져서 뺨을 긁었다.

 

"미안 마키나. 생전에는 이렇게 누군가에게 의지가 된 적이 없었으니까 무심코 들떠 버렸어." 

[……설명을 요한다. 유저의 전생은 그렇게 비참했습니까?]

 

"비참했다고 할까, 한심한 인생이었지. 형사가 되면 뭔가 바뀌는 게 있을 줄 알고 필사적으로 노력했는데……. 결과는 악당 한 명 잡지 못한 채, 피해 여성 한 명도 구하지 못한 채, 경찰청장의 아들을 때려서 징계면직. 시골로 내려가는 도중에 교통사고를 당해 설산에서 얼어 죽을 뻔했어. 정말로 변변찮은 삶이었어." 

 

볼품없지? 하고 쓴웃음을 짓는다.

그런 내가 신천지에서 어신체로 모셔지고 수많은 사람들을 돕게 되었기에, 약간 뿌듯한 기분이 들었던 것이다.

 

"어신체로 받들어져서 좀 우쭐했던 건 인정할게. 그래도 그걸로 도움을 받은 사람도 많으니까 내 소생이 늦어지는 것쯤이야 괜찮지 않을까?"

[……50% 이해했습니다. 그러나 유저가 소생하면 더욱 많은 사람들을 구할 수 있다고 증명되었을 터. 무엇보다 소생이 지연되어 피해를 입는 것은 유저입니다. 유저는 소생하고 싶지 않으십니까?]

"설마, 그럴 리 없지. 나도 빨리 소생하고 싶지만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은 당장 돕고 싶어. 언젠가는 도와 주러 올 테니 기다리고 있어……같은 말은 못 할 거야."

 

꾸욱, 수평에 놓인 채 서로 입을 다문다.

지금까지 몇 번쯤 이런 말다툼을 해 왔지만 마지막에는 항상 마키나가 져 줬다. 좋은 녀석이라고 마음 깊이 생각한다. 마음이 없다는 것은 새빨간 거짓말이다.

그러나 이번에는 그러지 않을 것 같다.

 

[하……. 유저의 마음씀씀이가 이렇게까지 좋을 줄은 계산하지 못했네요. 대단히 죄송합니다만, 강경책을 쓰지 않을 수 없겠습니다.]

"뭐여?"

[당일 오후 15:00부터 본 기기는 완전 폐쇄 모드로 이행합니다. 대기 중의 마력을 임계까지 집적시켜 소비를 억제하면 대략 200일쯤 걸려 소생이 가능하게 될 거라 계산했습니다.]

"오, 오오! 그런 빠른 수단이 있었으면 진작 좀 말하지!"

[그렇지만 완전 폐쇄 모드가 될 경우 긴급사태 이외에는 눈뜨는 것이 불가능하게 됩니다. 본 기기도 유저도 휴면 상태가 된다고 설명하면 이해하시겠습니까?]

 

휴면…… 그런가. 소생이 완료될 때까지 잠든다는 거구나.

우유부단한 나를 강제로 소생시키려면 그 정도로 과격한 처치가 필요하다고 판단했던 거겠지.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지금부터 참배 오는 사람들에게는 미안하기 그지없다.

적어도 휴면한다는 사실을 누군가에게 전할 수는 없는 것일까?

 

[그러실 것 같아서 시간을 15:00으로 설정했습니다. 그 시간까지는 항상 오는 그녀가……봐요. 오셨네요.]

타박타박타박, 발소리를 울리며 제단에 다가오는 여자.

5년이란 세월 동안 15살이 된 살리아가 공양물로 빵을 가지고 온 것이다.

키도 자라서 조금 성숙한 여성이 된 살리아.

아름다운 머릿결을 나부끼고 콧노래를 부르며 제단을 나아간다.

살리아는 이 시간이 되면 항상 공양물을 준비해 온다. 마키나는 그녀를 기다리고 있던 것이리라.

 

[그녀에게 사정을 설명합시다. 완전 폐쇄 모드에 들어가기 때문에 앞으로 소원에 응답해 줄 수 없겠다고요.]

"서, 설명이면, 어떻게?"

[데우스 엑스 마키나 루트 풀 오픈 · 스킬 다운로드.

정신 염화(*주: 念話; 텔레파시) 취득.

이것으로 대화가 가능해졌습니다.]

"그런 게 있었어?! 더 빨리 알려 줬으면 좋았을 것을!"

[필요성을 발견하지 못했던 점과, 유저에게 염화를 시키는 것에 대한 위기감이 있었기에. 이번에도 필요 최저한의 대화를 요합니다.]

 

말 한번 심하다. 그야 평소의 행실이 나빴던 탓도 있겠지만.

살리아는 그런 우리를 눈치채지 못한 채 어신체를 솔로 닦아 주고 있다. 정말 좋은 아이다.

자, 그럼 뭐부터 말할까.

이래봬도 일단은 어신체니까 말야. 아재 말투로 말을 걸면 수상해할지도 모른다. 마키나가 대신 말할 수는 있을까?

 

[긍정. 문장을 설정해 주신다면 본 기기가 대화하는 것은 가능.]

 

그럼 부탁한다.

 

"살리아…… 살리아…… 들리나요? 지금…… 당신의 마음에 말을 걸고 있습니다……."

"에……으에엑?!"

 

튀어오르듯이 놀라는 살리아.

아뿔싸, 붙들어놓는 데 실패했나?!

 

[본 기기의 책임은 전무. 반복한다. 본 기기의 책임은 전무.]

 

앞장서서 책임을 회피하다니, 더러운 AI군!!

하지만 이미 시작한 일은 어쩔 수 없다.

어흠, 하고 숨을 고른 나는 다시 한 번 자신을 소개한다.

 

"놀래켜서 미안합니다. 나는 이 어신체에 빙의되어 있는 정령…… 정령?

일단 정령입니다."

"ㄴ, 네! 5년 전에 절 구해 주셨던 그 정령님이십니까?!"

"그, 그렇습니다. 그 정령입니다. 잘 기억하고 있었네요."

"그야 물론이죠! 정령님이 도와 주시지 않았더라면 지금의 저는 없었을 거니까요!"

 

오오, 좋은 애구나 살리아.

처음 만났을 때의 일을 기억해 주다니 기쁘지 아니한가.

 

"그럼 살리아, 오늘은 당신에게 꼭 전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예."

"내가 <아트 나이트> 도시에 온 지 벌써 5년, 수많은 사람들에게 축복을 내렸습니다. 나의 마력은 이제 아주 조금밖에 남지 않았어요. 그런 고로 잠시 잠들게 되었습니다."

"그, 그럴 수가!? 괜찮으신지요, 정령님?!"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200일 정도 휴면하면 다시 부활하게 되겠죠. 이 일을 모든 도시 사람들에게 전해 줄 수 있겠나요?"

"물론이죠! 물론 괜찮겠지만…… 그게,"

 

뭔가 말하기 힘든 것처럼 말을 흐리는 살리아.

 

"왜 그러시죠? 무슨 문제라도?"

"……네. 사실은 최근에, 아쿠로 대제가 각지에서 침공을 개시해서요. 이 <아트 나이트> 도시까지도 침략하러 오는 게 아닐까 걱정이 돼서……."

 

아쿠로(悪路) 대제?

마키나, 누구 말이야?

 

[아쿠로 대제――세계 3대 제국 중 하나, 유피테르 제국의 황제. 타국을 침략하여 비대화된 나라. 현재도 치열한 타국 침공을 벌이고 있는 모양.]

 

전쟁…… 이 세계에도 전쟁이 있구나.

그리고 아쿠로 대제라는 놈이 이 도시까지도 침략하러 올지도 모른다라.

확실히 그건 불안하지. 

우리가 해 줄 수 있는 게 없을까?

 

[부정. 유저는 먼저 스스로가 소생하는 일을 염두에 둘 것을 추천합니다.]

 

뭐, 그러겠지. 지금 우리는 그저 구형의 어신체에 불과하니까.

적어도 뭔가…… 응?

 

"살리아, 그 반지는 혹시 약혼 반지인가요?"

"ㄴ, 네! 사실 저 약혼자가 생겨서요! 언젠가 이 제단에서 식을 올리기로 되어 있습니다!"

 

아아, 그렇구나. 살리아도 귀족의 딸이고 열다섯 살이니까.

이런 예쁜 아이를 데려가려는 사람이 없을 수가 없지.

하지만 그래…… 열다섯에 약혼이라…… 나 같은 경우엔 서른넷에 독신…… 살아 있었다면 지금쯤 39세 독신…….

 

[……34세 모쏠 아다. 풉]

 

주우우우욱여버린다 이 썩을 AI!!!

어, 어디서 알아온 거야?!!

 

"정령님?"

"실례했군요. 약혼이라면 경사스러운 일이네요. 너무 멋져서 울 것 같습니다. 축하로 뭔가 해 줬으면 하는 건 없나요?"

"괜찮습니다! 다음에 깨어나셨을 때는 약혼자도 소개해 드릴 테니 기대하고 계세요!"

 

으~음. 그러면 더욱더 뭘 해주고 싶어진다.

이렇게 매일 공양을 하고 어신체를 닦아 준 사례를 하고 싶다.

우리가 오늘도 반짝거릴 수 있는 것은 그녀 덕택이다.

무슨 특별한 축하를 해 주고 싶은데…… 어때?

 

[……이게 마지막 축복이라고 맹세할 수 있습니까?]

 

약속한다.

 

[데우스 엑스 마키나 풀 오픈 · 스킬 서치…… 후보를 4건까지 필터링했습니다. 원하는 스킬을 선택하십시오.]

 

좋아, 이게 마지막이다!

제일 화려한 걸로 가자 마키나!

 

[승인. 스킬 다운로드

화소천심마법 <춘색난만>을 취득.

마력 방출 개시!]

 

마키나가 선언하자, 한 줄기 바람이 불었다.

광장의 나무들을 흔들며 달려가는 바람은 순식간에 도시를 돌아 대수(大樹)의 꼭대기까지 솟아오른다. 바람에 닿은 나무는 순식간에 연분홍색 꽃을 피우고, 눈 깜짝할 사이 거리를 화사하게 물들인다. 

살리아는 그 광경에 아연해 있었다.

 

"와아……!"

"내가 주는 선물입니다. 다음에 만났을 때는 지금까지와 조금 다를지도 모르겠지만, 사이좋게 지내길 바래요."

"물론이죠! 정령님이 주무시는 동안 저희가 이 도시를 지킬 테니까요!"

 

미소로 떠나가는 살리아.

그 뒷모습을 웃는 얼굴로 지켜본다.

그런데…… 아쿠로 대제라.

이름만 들어도 나쁠 거 같은 녀석이야.

어떤 제국인지 알려 주지 않을래?

 

[긍정. 유피테르 제국은 인간을 중심으로 여섯 개 종족이 혼재되어 있는 제국.

인간족 · 수인족 · 귀인족 · 요정족 · 토드족 · 오토마타족의 6종.

세 종족은 전쟁에 패배해 병합되었다는 기록 있음.]

"나라를 형성하는 절반의 부족이 전쟁으로 병합되었구나. 정말이지 가혹하군."

 

[그 본인은 극악무도한 냉혈한. 제국의 신민 이외에는 철두철미하게 배척하여 돌아가는 국시(*주: 国是, 나라의 방침). 거스르는 자는 철저히 배제하는, 지상에서 제일 두려움을 사고 있는 황제.]

"……심했네. 나도 기억해 둘게."

 

신이 뭘 시킬 작정으로 날 보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지금까지 사람들을 돕는 데 어울려 줬으니 분명 좋은 신일 것이다.

그런 낙관을 품은 채, 나는 조용히 잠에 빠진다.

 

다음에 눈을 떴을 때는 분명, 다시 연분홍색 꽃잎이 도시를 뒤덮고 있을 것이라 믿고서.

 

 

 

 

 

 

 

 

--- 번역 코멘트 ---

 

 

 

▶ 화소천심마법 <춘색난만>: 원문 花咲天心魔法〝春爛漫〟

 

▶ 마을을 수호하는 큰 나무에 다종족국가 / 그것도 전작에서 썼던 귀인족과 요정족, 오토마타족도 나오네요. 밀리언 크라운과 아이언 아미의 요소도 얼핏얼핏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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